디스크립션
히어로 영화에서 거대 기업은 국가보다 강력한 기술과 자원을 보유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규제를 받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기업은 자유롭게 실험하고, 무기를 개발하며, 도시와 세계의 운명에 개입한다. 이 설정은 단순한 허구적 편의가 아니라, 현대 사회가 느끼는 권력 이동과 규제 불능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 히어로 영화는 왜 기업을 규제 밖의 존재로 그리는지, 그 서사적·사회적 의미를 드러낸다.
챕터 1. 위기는 규제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히어로 영화에서 기업이 규제를 받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서사의 기본 전제가 항상 ‘비상사태’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위기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상시적 조건에 가깝다. 외계 침공, 초과학적 재난, 인공지능 폭주, 행성 단위의 멸망 위협은 법과 제도가 작동하도록 설계된 정상 상태를 무력화한다. 규제는 안정된 질서를 전제로 하지만, 히어로 영화는 그 질서가 이미 붕괴된 상태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설정 속에서 규제는 보호 장치가 아니라 지연 요소로 기능한다. 승인 절차, 책임 검토, 법적 검증은 모두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히어로 영화의 위기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몇 분 안에 도시가 파괴되고, 몇 초의 지연이 인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규제는 현실적으로 작동 불가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 속도 차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규제를 비현실적인 이상처럼 밀어낸다.
이 공백을 채우는 존재가 기업이다. 기업은 이미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실험을 끝냈으며, 즉시 가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조직으로 등장한다. 국가는 판단하는 동안, 기업은 실행한다. 이때 기업의 규제 회피는 불법이 아니라 ‘불가피한 선택’으로 정당화된다. 규제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희생을 초래할 수 있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규제가 악의적으로 무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기업은 “법을 어기자”가 아니라 “지금은 예외다”라는 태도를 취한다. 이 예외가 반복되면서, 예외는 곧 규칙이 된다. 히어로 영화의 세계에서는 항상 다음 위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규제가 다시 복원될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규제는 언제나 ‘나중에’ 논의될 문제로 밀려난다.
이 구조는 관객에게도 설득력을 가진다.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규제를 요구하는 인물은 냉혹하거나 무능한 존재로 그려지기 쉽다. 반대로 규제를 뛰어넘어 행동하는 기업과 영웅은 현실적이고 결단력 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서사는 감정적으로 규제를 배제하도록 유도한다.
결국 히어로 영화에서 기업이 규제를 받지 않는 이유는, 위기가 규제를 작동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규제는 평상시의 윤리이지만, 히어로 영화는 평상시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설정을 통해 기업은 법 위의 존재가 아니라, 법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서 움직이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이는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위기 사회에서 제도가 얼마나 쉽게 무력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서사적 장치다.
챕터 2. 기업은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해결자’로 설정된다
히어로 영화에서 기업이 규제를 받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서사 구조상 기업이 처음부터 ‘통제해야 할 권력’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규제는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지만, 히어로 영화는 위험 그 자체를 제거하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때 기업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를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자로 설정된다.
영화 속에서 기업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존재에 가깝다. 외계 침공을 예측하고, 에너지 이상을 감지하며, 재난 발생 시나리오를 사전에 계산해 둔다. 국가는 상황을 보고받는 위치에 머무르는 반면, 기업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실행한다. 이런 구도에서 규제 기관은 무지하거나 뒤처진 존재로 묘사된다. 규제는 전문성의 부재를 상징하고, 기업의 자율성은 전문성의 증거가 된다.
이 설정은 기업을 도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는다. 규제는 의심과 제한의 언어지만, 기업은 책임과 헌신의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다”는 대사는 기업을 특권층이 아니라 희생하는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이 순간 기업은 감시받아야 할 권력이 아니라, 신뢰해야 할 동맹으로 인식된다. 규제는 불신의 표현이 되고, 자율은 신뢰의 표현이 된다.
또한 히어로 영화는 규제를 ‘사후 처리 장치’로 밀어낸다. 문제를 해결한 뒤에 책임을 묻는 구조다. 위기 해결 이전의 규제는 비현실적이지만, 해결 이후의 책임은 도덕적 논쟁으로 남겨진다. 이 방식은 서사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기업의 행동을 일시적으로 무제한화한다. 규제는 항상 늦게 도착하며, 기업은 그 사이에 세계를 구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사실상 국가 기능을 대체한다. 안보, 정보 통제, 기술 배치라는 영역에서 기업은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규제의 공백을 메우는 존재가 된다. 국가는 규칙을 만들지만, 기업은 현실을 작동시킨다. 히어로 영화는 이 차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규제의 필요성보다 해결 능력을 우선시한다.
결국 기업이 규제를 받지 않는 이유는, 서사가 기업을 ‘위험한 권력’이 아니라 ‘필요한 권력’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규제는 평시에는 합리적이지만, 히어로 영화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늦다. 기업은 규제 밖에 있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하기 때문에 세계를 구한다. 이 구조 속에서 규제는 논의 대상이 아니라, 위기가 끝난 뒤에나 등장할 수 있는 사치로 밀려난다.
챕터 3. 규제 부재는 현대 사회의 불안을 반영한다
히어로 영화에서 기업이 규제되지 않는 모습은 단순한 미화나 서사적 편의가 아니라, 현대 사회가 체감하는 불안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결과다. 현실 세계에서도 글로벌 기업은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기술 발전 속도는 법과 제도의 정비 속도를 지속적으로 앞질러 왔다. 히어로 영화는 이 현실을 한 단계 더 밀어붙여, 규제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를 전제로 삼는다. 이는 “이미 규제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집단적 인식을 반영한다.
이 서사에서 국가는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묘사된다. 법은 영토를 기준으로 작동하지만, 기업의 기술과 자본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한다. 인공지능, 위성 감시, 데이터 플랫폼 같은 권력은 국경 개념과 충돌하며, 히어로 영화는 이 충돌에서 국가가 패배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규제가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규제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규제의 역할은 제도에서 개인의 윤리로 이동한다. 히어로 영화는 법 대신 양심을 선택한다. 기업 내부의 도덕적 책임자, 재벌형 영웅, 양심적인 과학자가 규제의 대체물로 기능한다. 이들은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기술 사용을 중단하거나 수정한다. 이는 서사적으로 강력한 선택이다. 제도보다 인물이 빠르고, 인물은 감정 이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동시에 불안정하다. 개인의 윤리에 의존한 통제는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 히어로 영화는 이 취약성을 은근히 드러낸다. 영웅의 오판 하나로 도시가 파괴되고, 선의로 시작된 기술이 대량 피해를 낳는다. 규제가 없다는 사실은 자유를 의미하는 동시에, 언제든 재앙으로 전환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흥미로운 점은 히어로 영화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작품에서 기업은 일시적으로 제어되지만, 구조 자체는 유지된다. 규제는 강화되지 않고, 다시 다음 위기를 맞이할 준비가 시작된다. 이는 서사의 한계이자, 메시지다. 현대 사회 역시 기술과 자본을 완전히 규제하지 못한 채, 위험과 효율 사이에서 균형을 임시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히어로 영화 속 규제 부재는 “기업이 규제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규제가 충분하지 않다”는 불안의 표현에 가깝다. 기업은 통제되지 않은 채로 세계를 움직이고, 그 힘은 개인의 윤리에 의해 겨우 붙잡혀 있다. 히어로 영화는 이 불안정한 상태를 극적인 이야기로 전환해 보여주며, 관객에게 질문을 남긴다. 제도가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무엇으로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가.
결론
히어로 영화 속 기업이 규제를 받지 않는 이유는, 서사가 항상 위기와 속도를 중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규제는 평상시의 질서를 상징하지만, 히어로 영화는 예외 상황을 기본값으로 삼는다. 기업은 이 예외 속에서 유일한 해결자로 자리하며, 법 위의 존재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 설정은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느끼는 규제 불능성과 권력 집중에 대한 불안을 반영한다. 히어로 영화는 제도적 규제가 사라진 자리에 개인의 윤리를 놓으며, “힘을 가진 존재는 무엇으로 통제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