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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물에는 유독 막대한 자본과 기업을 소유한 ‘재벌형 영웅’이 반복 등장한다. 이들은 초능력보다 기술과 자본, 산업 인프라를 통해 영웅이 된다. 이러한 서사는 단순한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고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다. 재벌형 영웅은 자본의 힘, 책임의 문제, 그리고 통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불안을 동시에 담아낸다.
1. 초능력 대신 자본이 선택되는 이유

히어로물에서 재벌형 영웅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가 ‘힘’을 이해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영웅 서사에서 힘은 혈통, 신의 선택,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기술 발전을 거친 현대 사회에서 세계를 실제로 움직이는 힘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다. 자본, 기술, 인프라, 그리고 이를 동원할 수 있는 조직력이 곧 힘이 된다. 히어로물은 이 변화를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반영하며, 초능력 대신 자본을 영웅의 핵심 자원으로 선택한다.
재벌형 영웅의 능력은 개인의 신체나 정신에 있지 않다. 그의 힘은 연구소, 공장, 서버, 인재 집단, 공급망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에 있다. 이 구조는 개인의 한계를 압도한다.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자본은 가능하게 만들고, 시간과 위험을 단축하며, 실패를 반복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히어로가 하루아침에 세계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 뒤에 축적된 산업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설정은 관객에게 강한 현실감을 준다. 초능력은 상상이지만, 자본과 기술의 힘은 일상에서 이미 체감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 기업 하나의 결정이 도시의 운명을 바꾸고, 기술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사회 질서를 흔드는 현실 속에서, 재벌형 영웅은 오히려 비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저 정도 자원과 기술이 있다면 가능하겠다”라는 납득이 서사를 지탱한다.
또한 재벌형 영웅은 히어로물을 신화에서 사회 구조의 이야기로 이동시킨다. 영웅의 탄생은 운명이 아니라 소유와 접근성의 문제로 바뀐다. 누가 더 많은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가, 누가 기술을 설계하고 배치할 수 있는가가 곧 영웅의 자격이 된다. 이는 능력이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결국 초능력 대신 자본이 선택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힘의 형태가 자본이기 때문이다. 재벌형 영웅은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시대적 답변이며, 히어로물이 더 이상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산업 사회의 이야기로 재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다.
2. 재벌형 영웅은 자본 권력의 정당화 장치다
재벌형 영웅 서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이 인물이 자본 권력을 ‘정당화 가능한 힘’으로 재구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에서 자본은 불평등, 독점, 착취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히어로물은 동일한 자본을 전혀 다른 얼굴로 제시한다. 재벌의 부와 기업 권력은 개인적 사치가 아니라,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배치된다.
이 서사에서 자본은 축적의 결과가 아니라 책임의 조건이 된다. 재벌형 영웅은 “가졌기 때문에 싸운다”는 논리를 체현한다. 막대한 자원을 보유한 자는 그만큼 큰 위협에 대응할 의무가 있다는 설정이다. 이는 자본을 도덕적 의무와 연결시키는 방식이며, 자본 권력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다. 부유함은 특권이 아니라 부담으로 전환된다.
히어로물은 특히 기업 권력이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방어 기술, 의료 기술, 인프라는 시장 이윤보다 인류 보호를 위해 사용된다. 이때 기업은 더 이상 사적 이익 집단이 아니라,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을 대신 떠맡는 존재로 그려진다. 자본은 무책임한 힘이 아니라, 국가를 보완하는 공공 자원처럼 보이게 된다.
이 구조는 관객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거대 자본이 완전히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아니라, 올바른 인물의 손에 있을 경우 사회를 지킬 수 있다는 상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재벌형 영웅은 “자본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불안한 현실의 긴장을 완화한다. 문제는 구조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결론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이 정당화는 의도적으로 단순화된 서사다. 히어로물은 자본 권력을 개인의 도덕성으로 환원함으로써, 구조적 문제를 인물의 선악 문제로 축소한다. 기업 시스템이 가진 본질적 불균형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착한 재벌’의 존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는 현실에서 자본 권력을 바라보는 복잡한 질문을 잠시 유예시키는 서사적 선택이다.
결국 재벌형 영웅은 자본 권력을 미화하기보다는, 그것을 감당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존재다. 그는 자본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그 힘을 어떻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준다. 히어로물 속 재벌형 영웅은 자본주의 사회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하나의 위안이자,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덮어두는 상징적 인물이다.
3. 책임의 개인화라는 위험한 환상

재벌형 영웅 서사가 지닌 가장 큰 긴장은, 거대한 자본 권력의 문제를 한 개인의 도덕성과 결단에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기업과 자본은 본질적으로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힘이다. 수많은 이해관계자, 의사결정 체계, 시장 압력 속에서 움직이며, 한 사람의 의지로 완전히 통제되기 어렵다. 그러나 히어로물은 이 복잡한 구조를 의도적으로 단순화해, 모든 책임과 판단을 ‘재벌형 영웅 개인’에게 집중시킨다.
이 서사 구조에서 기업 권력은 위험하지만 관리 가능한 힘으로 그려진다. 조건은 단 하나, 그 힘을 쥔 사람이 충분히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벌형 영웅은 자신의 부와 기술을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하는 인물로 제시되며, 그의 양심이 곧 안전장치처럼 작동한다. 이 설정은 강력한 서사적 쾌감을 제공한다. 세계의 운명이 한 인물의 결단에 달려 있다는 구조는 명확하고 감정 이입이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인화는 동시에 위험한 환상을 만든다.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선의로 해결될 수 있다는 착각이다. 기업의 결정이 초래하는 불평등, 기술의 오남용, 권력 집중 문제는 시스템 차원의 통제와 규범이 필요한 사안이지만, 히어로물은 이를 ‘착한 재벌’의 존재로 우회한다. 그 결과 관객은 구조를 질문하기보다 인물을 응원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히어로물이 이 위험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재벌형 영웅은 끊임없이 실패하고, 오판하며, 그 대가로 막대한 피해를 목격한다. 그는 언제나 고독한 선택의 자리로 밀려나고, 자신의 결정이 가져온 결과를 혼자 감당한다. 이는 개인에게 집중된 권력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짐인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영웅의 고통은 권력의 무게를 시각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는 끝내 구조를 해체하지 않는다. 기업은 유지되고, 자본은 사라지지 않으며, 해결책은 다시 개인의 성찰과 결단으로 돌아온다. 이는 히어로물이 현실의 자본주의를 전복하기보다, 그 안에서 윤리적 균형점을 찾으려는 장르임을 드러낸다. 재벌형 영웅은 체제를 부수는 혁명가가 아니라, 체제를 관리하는 수호자에 가깝다.
결국 재벌형 영웅 서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가 자본 권력의 문제를 ‘구조적 개혁’이 아니라 ‘좋은 사람의 등장’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 서사는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담는다. 착한 재벌이 있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러나 그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기고 있다는 불안. 재벌형 영웅은 이 모순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현대 히어로 서사의 핵심 상징이다.
결론
히어로물에 반복되는 재벌형 영웅 서사는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를 반영한 결과다. 초능력보다 자본이 더 현실적인 힘이 된 시대, 히어로는 기업과 기술을 통해 탄생한다. 이 서사는 자본 권력을 윤리적으로 재해석하고 정당화하려는 시도이자, 동시에 그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될 때 발생하는 위험을 보여준다. 재벌형 영웅은 그래서 이상과 불안이 동시에 투사된 존재다. 그는 현대 사회가 자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싶은지, 그리고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히어로다.